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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자영의 금요칼럼]국회무용론(27) “선출된 공직자의 권력남용 막으려면” 3권 분립을 넘어 3권에 대한 국민 민초의 감시, 처벌권 확립해야

최자영 | 입력 : 2024/02/22 [10:00]

미국 독립혁명 당시 추구한 대의제 공화국과 로마 귀족 공화정은 같은 것 아니다
다수의 이름을 빌려 전횡하는 소수 권력자에 의해 소수와 다수가 다 같이 억압당해
3권 분립을 넘어 5권 분립(지역적 분권, 국민 민초에 의한 3권 감시권 포함) 제도 확립해야

<연방주의자 논집(페더럴리스트 페이퍼스)>이 “선출된 공직자의 권력남용 막으려면”이란 표제하에 한겨레(2024.1.26.)에 소개되었다. 공동저자[A. 해밀턴, J. 매디슨, J. 제이 공저 /김동영 옮김, 한울아카데미]인 해밀턴은 미국 연방정부 수립 뒤 초대 재무장관, 매디슨은 제4대 대통령을 지냈다.(한겨레, 2024.1.26.)

미국혁명의 정신은 1789년 미국 헌법 제정으로 구현됐는데, 이 헌법의 이론적·사상적 바탕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설명을 제공하는 역사적인 문헌이 <연방주의자 논집>이다. 그 내용은, 소수파 보호, 3권 분립 등의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한겨레>의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의 내용은 ① 연방제 통합 필요성에 따라, 직접민주 아닌 공화주의 정체 지향, ② 다수파의 전횡으로부터 소수파 보호, ③ 권력남용의 위험성에 대한 견제책으로서의 3권 분립으로 수렴된다.

연방주의자 논집(페더럴리스트 페이퍼스) (사진출처: 한겨레, 2024.1.26.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25994.html)
연방주의자 논집(페더럴리스트 페이퍼스) (사진출처: 한겨레, 2024.1.26.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25994.html)

 

아래에서는,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제시한 이 세 가지 원칙은 논리적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개진하도록 한다. 그 요지를 추리면, 첫째, 공화주의는 반드시 대의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직접민주와도 언제나 대항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둘째, 소수파는 다수의 권력과 대립각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수의 이름을 빌려) 소수가 전횡하는 권력에 의해 소수와 다수가 같이 억압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셋째, 권력의 견제는 권력 간 3권 분립으로 불충분하고, 3권에 대한 위임자 민중에 의한 감시와 처벌의 견제가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1) <연방주의자 논집>의 ‘공화정’의 개념이 갖는 한계점

매디슨은 ‘모든 권력을 국민의 다수로부터 위임받고, 그렇게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정해진 기간 통치하는 정부’를 ‘공화정’이라고 정의한다. 이 공화정은 국민 다수에 기반을 두고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아 통치하는 정부일 뿐, 소수 특권층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논집, 39)

그런데 <연방주의자 논집>의 공화국은 직접민주제를 비판하고 대의민주제를 옹호한다. ‘작은 공화국의 직접민주제’보다 ‘큰 공화국의 대의민주제’가 더 낫다는 것이다. 직접민주제로 운영되는 작은 나라에서는 특정 당파가 다수파가 되어 소수를 억압할 가능성이 크지만, 큰 나라에서는 이럴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대의제를 통하면 덕망 있는 대표들이 선출될 수 있고 그런 만큼 직접민주제의 폐해도 방지할 수 있으며, 그 사례로,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제가 대의민주제보다 더 쉽게 다수파의 전횡을 허용하며 나라의 혼란을 키운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연방주의자 논집>의 공화국 개념은 크게 서너 가지 점에서 오류를 범했다. ① ‘국민의 다수로부터 위임받고, 그렇게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정해진 기간 통치하는 정부’를 ‘공화정’으로 규정한 점, ② 직접민주제를 작은 것, 대의민주제를 큰 것이라고 규정한 점, ③ 직접민주제로 운영되는 작은 나라에서는 특정 당파가 다수파가 되어 소수를 억압할 가능성이 크지만, 큰 나라에서는 이럴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한 점, ④ 대의제를 통하면 덕망 있는 대표들이 선출될 수 있다고 본 점에서 그러하다.

위 ① <연방주의자 논집>에서는 ‘공화정’을 ‘국민의 다수로부터 위임받고,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 정해진 기간 통치하는 정부’로 규정했으나, 모든 공화정이 획일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예로, 로마는 공화정이었으나, 귀족공화정이었고, 그 귀족들은 평민과 다른 계층으로, 평민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존재가 아니었다.

귀족과 평민은 아예 다른 계층 사람들로, 그들 간의 정치적 갈등이 로마 공화정의 주요 흐름을 구성한다. 그 투쟁은 적어도 기원전 287년 호르텐시우스법이 통과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법으로 귀족과 평민은 합하여 ‘부족민회’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말하는 대의정은 없었고, 전에 없던 새로운 대토지 귀족(노빌레스)이 등장하여 귀족공화정의 면모를 이어갔다. 로마의 공화정은 대의제 공화정이 아니었다.

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로마의 귀족공화정과 <연방주의자 논집>의 대의제 공화정을 혼동하고, 양자를 동일시하며, 공화정은 다 민주적 대의제인 것처럼 간주하는 담론이 횡행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연방주의자 논집>의 대의제 공화정은 여러 형태의 공화정 가운데서 당시 미국인들이 지향한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② 직접민주제를 작은 것, 대의민주제를 큰 것이라고 규정한 데서, 아마도 전자는 반연방파로 주의 독립을 지향하는 이들, 그리고 후자는 연방파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문제는 첫째. 직접민주제와 대의제를 영역이나 수의 크기로 구분할 수가 없다는 점, 둘째, 직접민주제와 대의제는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는 점이다.

크기나 수는 상대적인 것으로 어떤 제도의 절대적 기준 혹은 속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연방 아닌 주 정부에서도 각기 직접민주제 아닌 공화정을 원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직접민주제와 대의제가 상반된 개념이 아닌 것은, 대의제 자체가 직접민주정의 요소를 가질 수도 있고, 반대로 과두적, 전제적 성격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수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다고 해도, 그 권력을 다수가 견제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전제적으로 행사될 수도 있다. 위임했다고 해도 그 위임한 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임자가 권력에 대한 통제권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 임기가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임자가 전임자와 대동소이한 경우, 사람을 바꾼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 더구나 다음 대의자로 교체할 때까지 권력이 잘못 행사되는 데서 발생하는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권력에 대한 견제는 선거에 의해 사람을 교체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의 오남용을 바로 중단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대의자의 권력 남용을 견제, 처벌하는 기능은 위임자인 다수 민중이 가져야 하고, 위임받은 대의자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후자의 경우 대의자끼리 카르텔을 맺어 실효성 있는 권력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수 위임자가 위임받은 이를 감시 처벌하는 것은 직접민주정치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③ <연방주의자 논집>에서는 직접민주제로 운영되는 작은 나라에서는 특정 당파가 다수파가 되어 소수를 억압할 가능성이 크지만, 큰 나라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작아진다고 했으나, 이 또한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다.

직접민주는, 바로 위에서 개진했듯이, 국가의 대소를 막론하고 적용 가능하다. 소수에 대한 억압은 국가 규모와 무관하게 동일하게 일어나며 그것은 권력구조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직접민주정치에서 특정 당파가 다수파가 되어 소수를 억압한다든가, 나라가 커질수록 소수를 억압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것이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규모와 무관하게,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기보다, 오히려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방주의자 논집>의 이 같은 논리는, 한겨레신문에서 피력하는바, 아마도 “영국에서 탄압받던 종교적 소수파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정착한 데서 미국이 출발한 사실과 연관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과 연계된다면, 그 자체로서 모순이 발생한다.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을수록 특정 당파가 다수를 장악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면, 소수 청교도가 쫓겨난 영국은 면적이 작고 인구가 적어서 특정 당파가 다수를 장악한 것이고, 그래서 소수인 청교도가 쫓겨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국이 작은 나라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④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대의제를 통하면 덕망 있는 대표들이 선출될 수 있다고 본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이런 시각은 인간 간의 차별을 전제한 것이다. 이는 능력이나 도덕성에서 남다른 이를 대의자로 뽑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 허점이 있다. 첫째, 인간은 모두 능력이나 도덕성에서 대동소이하거나, 평등하다. 혹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능력이 반드시 공익을 위해서 쓰인다는 법이 없다. 대개의 인간이 봉사와 희생보다는 사적 편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둘째 능력이나 도덕성에서 남다른 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이를 골라서 뽑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은 저마다 편견과 기호가 있어서 평가가 객관적으로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고, 실수 또한 번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 뽑힐 때는 크게 하자가 없었는데, 권력을 손에 쥐고 나자 돌변하는 일도 십상이다.

그렇다면, 대의제를 원용한다 해도 사람을 잘 뽑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또 대소 간에 권력을 쥐고 나면 사람이 표변하기도 한다. 그러니 잘 뽑으려 하는 시도 자체가 하릴없는 일이다. 차라리 아무나 뽑아놓고 그가 잘하도록 추달하고 감시하는 편이 낫다. 이를 위해 위임한 다수는 그 감시의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고, 이 과정에서 바로 직접민주주의의 요소가 기능하는 것이다.

2) 공화정이 다수파의 전횡으로부터 소수파를 보호한다는 주장이 갖는 문제점

<연방주의자 논집>에서는 나라 규모가 클수록 다수파의 전횡으로부터 소수파를 보호하는 데도 유리하다고 한다. 작은 공화국의 경우엔 특정한 이해관계를 지닌 당파가 다수를 확보해 소수파를 배척하기가 훨씬 쉽다고 보았고, 또 나라가 크고 인구가 많을수록 특정 당파가 다수를 장악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연방주의자 논집>의 논조와 달리, 특정 당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작은 공화국뿐 아니라 크고 인구가 많은 곳에서도 가능하다. 또 특정의 다수당만 아니라 소수당도 다수당에 편승하여 ‘소수’를 배척할 수 있다. ‘소수’를 배척하는 것은 ‘특정’의 정당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군소 정당을 포함하여 정치 권력 일반에 두루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특정 당파가 반드시 다수를 대표 혹은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수를 대표하여 특권층을 보호하는 경우가 있고, 이런 현상은 드문 것이 아니다. 나아가, ‘소수 보호’의 논리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소수 강자가 다수 약자를 억압하는 데 원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권력에 의한 억압 가능성은 다수 혹은 소수 여부와 무관하게 권력의 크기가 클수록 커진다.

반면, 약자 측 ‘소수’의 보호는 정당 중심의 정치적 논리가 아니라, 반대로 정치 외(外)적 논리, 즉 ‘자유 방임’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소수의 보호는 정부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부 권력이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고, 이것은 권력이 아니라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이때 정부는 보충성의 원칙에 의해, 최소한의 기능만으로 작동함으로써 부득이한 것만 다수결로 결정하고, 나머지 영역은 방관해야 한다. 그래서 소수의 권리는 다수 혹은 특정 정당에 의해 억압받는 것이 아니다.

3) 권력 남용의 위험성에 대한 견제책으로서 제시된 3권 분립이 갖는 한계점

매디슨은 51번째 글에서 선출된 공직자가 권력을 남용하고 국민 위에 군림할 위험이 있음을 강조하며 그런 위험의 원천을 ‘인간의 본성’에서 끌어낸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야심 덩어리여서 제약을 받지 않으면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쓰게 돼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애초에 정부란 무엇인가? 인간성에 대한 가장 큰 불신의 표출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만약 인간이 천사라면 어떤 정부도 필요 없을 것이다. 또 천사가 인간을 다스린다면 정부에 대한 외부적 통제도 내부적 통제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의 남용을 막으려면 다른 권력의 견제를 빌리는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두고 매디슨은 “야심에는 야심으로 대항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3권 분립이다. 입법부와 행정부와 사법부가 독립해 서로 견제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권력 남용을 막는 길이다. 권력자가 국민을 억압하지 못하게 하려면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도로 구현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 목도하듯이, 3권은 분립이 아니라 똘똘 뭉칠 수도 있다. 또 뭉치지 않고 분열하는 경우라면, 서로 우기고 다투기 때문에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예를 들면, 국회에서 검찰정상화(검수완박) 입법을 했더니, 행정부에서 시행령을 통해 이를 ‘검수원복(제 자리로 되돌림)’해버리는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3권이 카르텔을 만들거나, 반대로 분열하여 갈등하는 경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그 궁극적인 결정권은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투표로서 판가름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도 직접민주의 요소가 기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위에서 논한 첫 번째, “공화정은 직접민주제가 아니라 대의민주제”라는 전제는 수정되어야 한다. 공화정의 대의제는 직접민주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의 감시체제 아래 성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뿐 아니라 중앙정부의 3권 카르텔에 의한 독주를 막기 위해 각 지역으로 권력을 분산하여 경쟁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겠다. 이는 3권 분립을 넘어 5권 분립을 뜻한다. 5권 분립이란 3권에다 국민 민초의 감시 처벌권, 지역적 분권 등 2권을 더한 것이다.

한국의 현실을 돌아보면, 입법권은 국회에서만 갖고 국민에게는 그 발의의 권한이 허용되지 않고 있다. 또 국민투표 부의권은 대통령에게만 부여(헌법 제72조)하고, 국민은 물론 국회조차 이를 가지지 못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공화정은 민주가 아니라 국회의 과두체제와 대통령의 일인 독재를 연출한다. 과두와 독재가 결합된 정치체제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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